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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진주의 큰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 , 남성당 한약방 운영

김장하 선생은 경남 사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했습니다. 열아홉 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열아홉살 최연소의 나이로 한약업사 시험을 치고 그 누구도 시험에 붙을 줄 몰랐는데, 김장하 선생은 합격하였고 이듬해 1월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인 1973년 진주시 동성동으로 이전했습니다. 그가 운영한 남성당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으며 50년간 운영되다가 2022년 5월 말에 영업을 종료하였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이 돈을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습니다. 특히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0여년간 이사장을 하면서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완비한 후에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하였습니다.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고, 지금까지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있습니다. 그의 지원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그는 진주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단체나 언론·역사·환경운동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조건 없이 지원해 왔습니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 가을문예'를 지원했습니다.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 사업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는 직접 설립에 앞장섰고,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 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에도 힘쓰는 등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 선생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 선생은 재단 해산(2021년)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MBC 경남 특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2022년 연말 MBC경남 유튜브와 TV를 통해 동시방영된 뒤 호평이 이어지자, 설 연휴 전국 방송을 통해 해당 프로그램이 재방영되었고, 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넷플릭스 화제작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과 웨이브 오리지널 국가수사본부를 꺾고 교양부분 작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역 지상파의 작품이 수상하는 것은 어른 김장하 프로그램이 최초라고 합니다.

MBC 경남은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공동 취재해 <어른 김장하>를 제작했고,  김주완 기자는 30년 전 실패한 김장하 선생 인터뷰에 재도전하며 어느덧 중년이 된 기자 스스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를 탐색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어른 김장하>를 제작한 김현지 PD는 이 취재가 완벽하지 않다고 말하며 무엇보다 김장하 선생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모두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원한 장학생의 정확한 규모 등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김장하 선생과 제대로 갖추어진 인터뷰 역시 없습니다. 대신 김장하 선생에게 도움받은 인물 30여 명의 증언을 통해 그의 공적과 영향력을 재구성하였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이렇게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누구를 돕게 도 보도자료 등을 일체 내지 않으며, 무엇보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김주완 기자가 7년이 넘게 그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썼는데 그 숫자만 대략 100명이 넘습니다. 김 기자는 김장하 선생과 함께 산을 오르거나 모임에 참석하면서 곁에서 그를 바라봤고, 카메라도 없이 갔다가 핸드폰으로 부랴부랴 촬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사를 보면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1990년대 첫 민선 진주시장 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압도적으로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했는데, 그는 후보를 제안하러 오는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했으며 주변에서 경남도문화상이나 진주시 문화상, 경남교육 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못하게 하거나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고 하느냐'며 극구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호 남성 (南星) 은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셨고 '남성은 목숨 수(壽)를 맡은 별이라고, 남성이 비치는 곳에는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으며,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고, 집도 따로 없이 한약방 건물 3층을 집으로 사용했으며, 해외여행도 다닌 적이 없는데 여행이라고는 2005년  6.25 전쟁 때 전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친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 평양을 방문한 것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는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아온 김장하 선생의 삶을 주변인의 목소리로 기록하였고, 김장하 선생의 생애사에 주목하기보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진정한 어른을 다큐멘터리로 꼭 만나보세요